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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ndelion Girl - 민들레 소녀 민들레 소녀

민들레 소녀
by Robert F. Young

 마크는 언덕 위의 그 소녀를 보며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Edna St. V. Millay)를 떠올렸다. 그건 아마 그녀가 민들레 빛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면서 오후의 햇살 아래 서있던 까닭일 것이다. 어쩌면 고풍스런 흰 드레스 자락이 길고 가는 두 다리를 감도는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왠지 그녀에게서는 과거에서 현재로 걸어 나온 듯한, 그런 명확한 느낌이 들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넘어왔었기 때문인지, 상당히 기묘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뒤쪽에 얼마쯤 떨어진 데서 멈춰선 그는 올라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그녀가 이쪽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어떡해야 놀라지 않도록 자기가 있는 걸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쩌면 좋을지 계속 생각하면서, 파이프를 꺼내서 연초를 채워 불을 붙이고, 말아 쥐며 불씨가 살아나도록 빨아들인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손이 닿을 듯한 하늘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얼굴에 와닿는 바람을 즐기며 천천히 다가갔다. 좀 더 자주 산책 해야겠어, 라고 그가 되뇌었다. 언덕에 다다를 때까지 한참을 거닐어 지나온 숲이 이제는 뒤쪽으로 멀리 내려다 보였다. 첫 단풍으로 서서히 불이 붙어가는 듯한 숲, 그 뒤로는 작은 호수와 함께 딱 알맞은 오두막과 낚시터가 있는, 그런 숲이었다. 아내가 갑작스레 배심원 자격으로 소환되는 바람에, 간신히 마련한 이 주 간의 여름휴가를 홀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된 남자가 혼자서 외로운 나날을 지내는 곳인지라, 낮에는 잔교에 앉아 낚시나 하고, 쌀쌀한 저녁께는 처마 비치는 거실에서 커다란 벽난로를 쬐며 책 따위를 읽었다. 마침내 이틀간의 일상에 지쳐버린 그가 목표고 방향이고 없이 무턱대고 숲에 들어가서, 결국은 언덕까지 이르러 오르던 중 그 소녀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가며 본 두 눈동자는 파란 빛이었다. 마치 하늘을 그 가느다란 실루엣 안에 담아낸 듯이 푸르렀다. 어려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둥글고 부드러워 휘어져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 얼굴에서 떠오르는 기시감은 너무나 강렬했기에,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려는 충동을 그는 억눌러야만 했다. 비록 두 손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손끝이 저려오는 게 가시질 않았다.

 이런, 내 나이가 마흔하고 넷이라고, 라며 스물도 채 안될 법한 아가씨를 보며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경치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하고 그가 큰 소리로 물어봤다.

 "아, 네!" 두 팔로 빙글, 원을 그리듯 기운차게 돌아선 그녀가 대답했다.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아요?"

 그의 시선도 소녀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갔다. "그래." 하고 그가 말했다. "정말이야." 다시금 언덕 아래로 펼쳐지는 숲은 9월의 따스한 빛깔로 퍼지며 수 마일쯤 떨어진 작은 마을을 둘러쌌고, 교외 경계 근처에 제일 먼저 보이는 외딴 건물 즈음에서야 끝이 났다. 멀리서 보이는 코브 시티(Cove City)의 톱니모양 윤곽이 아지랑이에 흔들려서 보이는, 여기저기가 뾰족한 중세 시대 성 같은 모습은 현실보다는 차라리 꿈속의 그것 같았다. "너도 저 도시에서 온 거니?" 그가 물었다.

 "어떻게 보면, 그렇기도 하네요." 라고 마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전 지금부터 이백 하고도 사십 년 뒤의 코브 시티에서 왔거든요."

 그 미소는 자기 말을 마크가 믿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듯 했지만, 그가 믿는 척이라도 한다면 재밌겠다는 뜻 또한 담겨있었다. 그는 미소에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면 서기로 이천이백 일 년이네, 맞지?" 하고 그가 말했다. "그때쯤은 저기도 엄청나게 커졌을 것 같은데."

 "어머, 그럼요." 그녀가 말한다. "저긴 지금 대도시의 일부분이고, 모든 길이 저기로 뻗어요." 그녀는 발 아래로 보이는 숲 언저리를 가리켰다. "이백사십 번째 도로가 저 사탕단풍나무 숲 위로 곧장 지나가요." 그녀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저쪽에 서있는 아카시아 나무들 보이세요?"

 "음," 그가 답했다. "저기 보인다."

 "저긴 새 쇼핑센터 자리예요. 거기 마트는 정말 커서 둘러보는데만 반나절이고, 아스피린부터 에어로카까지 없는 게 없어요. 또 지금은 너도밤나무 길이 있는, 그 마트 옆에는 최고의 재단사들이 지은 최신 작품들이 꽉 들어찬 커다란 옷가게가 있어요.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드레스도 오늘 아침 일찍 산거예요. 정말 예쁘죠?"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입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티내지는 않고 드레스를 살펴봤다. 보기에는 솜사탕, 또는 바다거품이나 눈으로 짜낸 듯, 그에게는 전혀 생소한 옷감으로 돼있었다. 기적의 섬유 제조업자 정도나 지어낼 수 있을 그 합성직물에는 더 이상 한계란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린 소녀가 지어낼 수 있는 긴 이야기에도 한계가 없어보였다. "너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 온 것 같구나."

 "네. 아빠가 발명하셨거든요."

 마크는 그녀를 자세히 살펴봤다. 더 없으리만치 거짓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아가씬 여
기 자주 오나?"

 "그럼요, 여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공간좌표예요. 어떤 날은 네 시간 동안 여기 서서, 보
고 보고 또 볼 때도 있는걸요.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내일이 있을 수가 있지?" 라고 마크가 물어왔다. "항상 같은 시점으로 돌아오는 거잖아."

 "아, 그건 말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뭐든 그렇듯이, 그 타임머신도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 그래요.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좌표에 남고 싶으면, 매번 스물네 시간을 돌리면 돼요. 전 돌아올 때 마다 다른 날에 오는 게 더 좋으니까, 절대 안 그러지만요."

 "아버지는 같이 안 오시고?"

 V자로 무리 지은 거위들이 머리 위로 천천히 날아가는 모습을, 그녀는 잠깐 동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빠는 지금 거동이 불편하세요." 그녀는 마지막에 덧붙였다. "올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오고 싶으실 거예요. 대신 제가 보고 온 걸 모두 얘기해드리고 있어요." 그리고 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빠가 정말로 와서 보셔도, 거의 같을 만큼 똑같이 얘기해요. 그 정도로는 모자란 걸까요?"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마음이 움직일 만큼 열의가 담겨있었기에 "분명히 충분할거야."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물어봤다.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겠지?"

 그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기분 좋은 초원에 서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무척 이득이에요. 이십삼 세기에는 그런 초원이 얼마 안 남았다니까요."

 그가 미소 지었다. "이십 세기에도 그런 초원은 얼마 남아있질 않지. 여긴 수집가 물건 자랑처럼 아가씨가 자랑해도 될만 할거야. 좀 더 자주 와봐야겠는데."

 "근처에 사세요?" 그녀가 물어봤다.

 "삼 마일쯤 뒤쪽에 있는 오두막에 머물고 있거든. 휴가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영 제대로 되질 않아서, 우리 안사람이 배심원 일로 불려가는 바람에 같이 못 왔어. 미룰 수도 없고 결국은 혼자만 온 바람에, 내키지는 않지만 지루하게 소로(Thoreau)씨 같은 생활 중이지. 내 이름은 마크 랜돌프(Mark Randolph)야."

 "전 줄리예요." 그녀도 대답했다 "줄리 댄버스(Julie Danvers)."

 썩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한가지로 새하얀 드레스도 잘 어울렸다. 뿐만 아니라 푸른 하늘도, 이 언덕도,  9월의 서늘한 바람도 마찬가지다. 아마 그녀가 저 숲 속의 작은 마을에 살기 때문이겠지만 별 문제 없겠지. 줄리가 미래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한대도,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줄리를 처음에 본 느낌과, 그 온화한 얼굴을 볼 때마다 엄습하는 가슴저림이었다. "줄리 넌 무슨 일을 하니?" 그가 물었다. "아니면 아직 학생인가?

 "비서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반걸음을 내딛고 귀엽게 돌아서며, 두 손을 마주잡고는 말했다. "비서가 되면 정말 좋을 거예요." 라며 말을 이어갔다. "분명 커다란 중요 사무실에서 높은 사람 지시를 정리하는, 그런 정말 멋진 일을 하는 거예요. 저를 비서로 고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랜돌프 씨?"

 "그러면 나야 좋지." 그가 답했다. "아내도 전에는 내 비서였어, 전쟁이 나기 전에. 그렇게 아내랑 만났단다." 왜, 지금 그 이야기를 한 것일까? 의아했다.

 "훌륭한 비서셨나요?"

 "그야말로 최고였지. 유능한 비서를 잃어서 안타까울 따름이야. 다만 그쪽에서는 그녀를 잃었지만, 다른 의미로 얻었으니까. 아주 잃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

 "음, 정말 그러네요. 어, 랜돌프 씨,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빠가 제 얘기를 기다리실 것 같기도 하고, 저녁도 차려야 하거든요."

 "내일도 올 거니?"

 "아마 올 거예요. 지금까지도 매일 왔거든요. 그럼 일단 가볼게요, 랜돌프 씨."

 "그래. 잘 가렴, 줄리." 하고 마크가 인사했다.

 그는 곧장 달려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백사십 년쯤 지나면 이천사십 번째 도로가 생기는 사탕단풍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니 미소가 배어나왔다. 정말 즐거운 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주체 못 할 호기심이 있고, 열정이 있다면, 분명 무척이나 즐거운 인생일 것 같다. 그 두 자질을 거부해온 적 있는 그이기에, 줄리가 가진 긍정적인 자질들을 더없이 잘 알 수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중대한 청년기를 진로만을 생각하며 오직 로스쿨에 묻어버렸기에, 스물넷에는 작기는 해도 번듯한 자기 사무소도 차릴 수 있었다. 그걸 위해 그는 인생을 전부 투자했다. 아주 전부는 아니지었만. 앤(Anne)과 결혼하고 나서 살림을 꾸리는 잠시 동안만큼은, 그 긴박감을 약간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 뒤에 전쟁이 터지면서, 또 그런 시기가 있기도 했다. 요전의 공백기가 기억도 안 날 만큼 별 것 아니게 느껴지는, 훨씬 오랜 공백기였다. 전쟁이야 결국 어떻게든 끝났지만 아내뿐이던 식구에 아들이 생기자, 이번엔 긴박감이 앙갚음이라도 하는 양으로 뒤를 쫓아왔다. 그 후로는 지금과 같은, 사 주뿐인 연례휴가만 제외하고 정신없이 보낸 것이다. 본래라면 이 주는 아내와 아들 제프(Jeff)가 고른 리조트에서 지내고, 나머지는 보통, 제프만을 대학에 돌려보내고 앤과 둘이서만 그 호숫가 오두막에서 보내겠지만, 올해는 그 두 주 간 혼자 있게 된다. 그래도 아마, 아주 혼자는 아닐 모양이다.

 파이프가 얼마 전부터 꺼져 있었지만,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 다시 불을 댕기고 바람을 등져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신 그는, 오두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언덕에서 내려와 숲을 지났다. 추분이 지나선지 날이 훨씬 짧아져 있었다. 해도 벌써 뉘엿거려서 바람이 저녁 습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서 해가 질 녘에는 호수에 도착했다. 그 호수는 작지만 깊이가 있었고, 바로 주변에는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호숫가에서 얼마쯤 뒤에는 소나무들과 함께 서있는 오두막이, 구부러진 오솔길을 따라 잔교로 이어졌다. 그 뒤쪽, 자갈 깔린 비포장도로는 큰길로 들어가는 흙길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문명 속으로 그를 돌려놓을 것 같은, 타고 온 스테이션 왜건은 뒷문간에 세워둔 채였다.

 간단하게 저녁을 준비한 그는 부엌에서 조촐하게 식사를 마친 뒤에, 책을 읽으러 거실로 향했다. 차고 안의 발전기가 이따금씩 웅웅댔지만, 그것만을 제외하면 현대인이 늘 듣는 일상적인 소음조차 침범 못하는 밤이었다. 벽난로 옆에 있는 꽉 들어찬 책장에서 미국 명시 모음집을 골라든 그는, 자리에 앉아 '언덕 위의 오후'를 찾느라 책을 뒤적거렸다. 그 명시를 세 번이나 음미하는 시간동안, 읽는 매번 햇살 한 가운데 선 그녀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 머리카락이, 길고 예쁜 두 다리를 감돌던 부드러운 눈 같은 흰 드레스 자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목이 메어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차마 삼켜 넘길 수가 없었다.

 시집을 제자리에 꽃아 두고는 투박한 베란다로 나와 선 그는 파이프에 연초를 채워 담뱃불을 붙였다. 그가 억지로 앤을 떠올려내자 이내 그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꼭 다물었지만 부드러운 턱선에 그가 모를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묘한 낌새가 어렸음에도 따스하고 자상한 두 눈망울, 여전히 변함없이 매끄러운 두 뺨과 얼굴에 드리운 상냥한 미소. 여기에 담갈빛 머리칼이며, 매끄럽고 나긋나긋해서 우아한 몸짓마저 기억에 겹쳐지자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만큼 깊이가 더했다. 그가 아내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랬지만 나이라고는 전혀 들지를 않는 모양이, 어떻게 그리도 수년이 흐르도록, 그 옛날 책상 앞에 서있는 겁먹은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바라봤던, 그 아침 날 그대로 어여쁜지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고작 이십 년 정도 지났다고 해서 딸아이나 될 법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어린 아가씨와의 만남을 고대하게 되다니,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설마, 하고 그는 잠깐이나마 동요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잠깐 감정이 평정을 잃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린 것뿐이다. 이젠 제자리로 돌아와서 세상은 본래의 분별 있는 생활의 궤도를 되찾았다.

 그는  파이프를 떨어내고 집 안으로 돌아갔다. 침실로 들어가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침대로 파고들며 조명을 껐다. 평소라면 금방이라도 잠들었을 터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간신히 드리운 수마는 달뜬 꿈결을 장식처럼 흩뿌려놓은 단편들의 모습이었다.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그녀는 말했었다.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에요."



· · · · · 


 그 다음번 오후에는 그녀가 입고 온 푸른 드레스에 꼭 어울리는, 푸른 리본으로 민들레 빛 머리를 묶어 내리고 왔다. 언덕을 다 오른 그는 잠깐 멈춰 서서 턱까지 차오른 숨이 그치도록 기다렸다가 단걸음에 바람 부는 가운데 선 그녀 곁에 다가섰다. 그러나 부드럽게 휘어지는 목과 턱이 그리는 고운 선에 다시금 숨이 막혀버려서, 돌아서는 그녀에게 "안녕하세요. 오실 줄은 몰랐어요." 라고 인사를 받고서도 대답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왔지." 마침내 대답했다. "너도 그렇고."

 "그러네요." 그녀도 말을 이었다. "정말 기뻐요."

 근처에 벤치 비슷하게 생긴 화강암 바위가 드러나 있어서, 함께 앉아 아랫녘에 펼쳐지는 땅을 바라봤다. 그는 파이프를 채워 불을 붙이고는 바람결에 연기를 내뱉었다. "우리 아빠도 파이프를 피우세요." 그녀가 말을 붙였다. "불을 붙이고 나면 당신처럼 똑같이 손으로 감싸요. 바람이 안부는 데서 도요. 아빠랑 이것저것 닮았네요."

 "아버지 이야기 좀 해줄래?" 하고 말을 꺼냈다. "네 얘기도 같이."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스물한 살 이고 아버지는 은퇴하신 정부소속 물리학자셨으며, 부녀가 이천 사십 번 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함께 사는데, 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줄곧 집안일을 도맡아 왔다는 이야기. 말을 끝맺은 다음엔 그가 자신과 앤, 제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제프와 같이 일하기로 한 했던 일, 앤의 카메라 공포증과 결혼사진조차 못 찍고 그 뒤로도 한 장도 못 찍었던 일이며, 가족 셋이 모두 모여 캠핑 여행을 떠나 멋진 한때를 보냈던 지난 여름일들.

 말을 마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랑 정말 멋지게 지내셨네요. 1961년은 되게 살기 좋았겠다!"

 "마음대로 되는 타임머신이 있으니까, 좋아하는 시간대에 여기로 오면 되겠구나."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구요. 제가 아빠를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건 나중 얘기고, 시간경비대라는 게 있다는 걸 명심해야 돼요. 아시겠어요? 시간여행은 정부에서 용인하는 역사 원정대 대원들한테만 허가가 나는 거라, 일반 대중들에겐 제한되는 거라구요."

 "넌 잘만 되는 것 같은데?"

 "그야 아빠가 고유장치를 고안해 내신데다, 시간경비대에선 이걸 모르거든요."

 "그래서야 넌 여전히 위법 중인거네."

 그녀가 끄덕였다. "그치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기네들 시간개념뿐인 걸요. 아빠는 독자적인 이론이 있으세요."

 그녀의 말소리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만큼 무척이나 듣기 좋았고, 그에겐 그저 그녀가 재잘대는 게 좋아서 화제가 억지스러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설명 좀 부탁할게." 라고 그가 말했다.

 "일단 공식적인 개념부터 알려드릴게요. 그걸 지지하는 사람들 말로는, 미래에서 온 사람
은 과거에 발생한 어떤 것에도 물리적으로 관여하면 안된대요. 현재에 즉시 패러독스를 구성해서, 받아들여진 패러독스가 바로잡히도록 미래 경과가 바뀔게 분명하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시간여행관리국은 공인된 인원에 한해서만 자기네 타임머신에 접근할 수 있게 하면서, 인생에 샛길을 원하거나 역사가로 위장한 채로 다른 시대에 영구히 눌러앉고 싶어 하는, 자칭 시대도약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비 병력을 유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빠가 제시하신 개념에 따르면, 시간이라는 책은 이미 쓰여 있는 거예요. 거시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발생할 모든 건 이미 발생해 왔다, 고 아빠는 그러세요. 그러니까 미래에서 온 사람이 과거 사건에 관여한대도, 애초부터 그 사람도 사건의 일부였다는 간단한 이유로 사건의 일부분이 되고, 패러독스도 생길 수가 없는 거죠."

 마크는 파이프를 깊게 빨았다. 그 한 모금이 절실했다. "아버지가 상당히 대단한 분이신 것 같구나." 그렇게 말했다.

 "네, 그럼요!" 열기에 뺨에 발갛게 번지며 새파란 두 눈이 반짝였다. "아빠가 책을 얼마나 읽으셨는지 랜돌프 씬 못 믿을걸요? 어휴, 그것 때문에 우리 아파트가 꽉 들어차 있다니까요! 헤겔이며 칸트며 흄에다가, 아인슈타인이랑 뉴턴에 바이츠재커까지. 저도 몇 권 정도는 읽었답니다."

 "내 경우도 그 정도로 모였지. 읽기도 읽었고."

 그녀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단하네요 랜돌프 씨." 하고 그녀가 감탄했다. "분명 우리, 취향이 꽤 맞을 거예요!"

 꼬리를 무는 대화는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초월적 감성학에, 버클리 철학이니, 상대성이니 하는 것들이라, 아저씨와 아가씨가 9월 언덕배기에서 나눌 화제 치고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물며 마흔넷 아저씨와 스물한 살 아가씨인 바에야. 그렇지만 대화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들이 나누는 초월적 감성학에 대한 활기찬 토론은 단순하게 연역적, 귀납적 결론은 도출하는, 그 이상을 이끌어내면서, 그녀의 두 눈에 자그마한 별들을 이끌어냈다. 또, 그들의 버클리 분석은 머리 좋은 주교님의 이론에 대한 본질적인 결점을 강조하는, 그 이상을 강조해내면서, 발그레한 그녀의 두 뺨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대성에 대한 고찰은 E=mc²를 증명하는, 그 이상을 증명하면서, 학식이란 여성적인 매력에 방해는커녕 자산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 때 기분은 여운의 범주를 넘어서 훨씬 오래도록 머물러, 그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됐다. 이번엔  앤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쓸 데 없으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는 대신 어두운 가운데 누워서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늘어놨다. 그러면 생각들은 하나같이 9월께 언덕배기며, 민들레 빛 머리칼인 아가씨에게 이어졌다.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그녀는 말했었다.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에요."

 다음날 아침, 그는 차를 몰아 마을로 내려가서, 별다른 우편물이 없는지 보러 우체국으로 갔다. 전혀 없었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제프는 자신만큼이나 편지 쓰기를 질색하고, 앤은 마침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업무에 관해서는, 어지간히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면 비서가 성가시게 하지 않도록 해뒀다.

 그는 여윈 우체국장에게 가서, 이쪽 지역에 댄버스라는 가족이 사는지를 물어볼지 말지 고심했다. 묻는 짓은 않기로 했다. 그래서야 줄리가 정교하게 지어올린 가공의 결과물을 해치는 짓이 돼버리는 데다, 아무리 그 체계의 타당성을 못 믿겠다고는 해도, 내심 그걸 무너뜨릴만한 구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머리색을 닮은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바라보자면 다시금 숨이 그치고, 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런 첫 순간도 잠시. 말문이 트이고는 괜찮아지자 두 사람의 생각은 물거품 이는 두 줄기 시내처럼 계속되며, 말라붙은 제자리에 기분 좋게 흘러들었다. 이번에 헤어질 때는 "내일도 오실 거예요?"하고 물어본 건 그녀 쪽이었다. 자기 입에서 나올 말을 가로채였기 때문일 테지만, 그래선지 숲길을 지나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서, 저녁 동안을 베란다에서 파이프 피우며 다 보낸 뒤에야 잠에 들 만큼 누그러졌다.

 다음 오후에 오른 언덕은 텅 비어있었다. 처음엔 실망감에 멍청히 서 있다가 생각했다. 늦는 거라고, 그럴 뿐이라고. 분명 잠깐 있으면 그녀는 나타날 것이다. 그는 기다리느라 화강암 벤치에 앉았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수 분이 지나고, 수 시간이 지났다. 어둠이 슬그머니 숲으로 번지며 언덕 중턱까지 올라왔다. 공기는 더 차게 식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초라하게 오두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다음 오후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잠에도 들 수 없고 먹을 수도 없었다. 이젠  낚시도 흥미가 사라졌다. 책도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또, 그러는 동안 아예 자기가 혐오스러웠다, 사랑에 번민하는 남학생 같았던 행동이, 예쁜 얼굴에 잘 빠진 다리면 환장하는 여타 다른 사십 대 멍청이들 같았던 반응이, 정말이지 미워졌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다른 여자에는 관심둔 적도 없었는데, 여기 와선 일주일도 안 되는 동안 한 사람을 눈여기는 걸로도 모자라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나흘간 매일같이 언덕에 오르며 갖고 있던 희망이 시들어 갈 무렵, 햇살 한 가운데 서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것은 불현듯 되살아났다. 이번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에게 그동안 부재했던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그제서야 다가서는 그에게, 그녀 두 눈에서 흐르기 시작한 눈물방울과 숨기지 못할 만큼 떨리는 입술이 보였다. "줄리, 무슨 일이야?"

 어께를 들썩이는 채로 매달려온 그녀는, 그의 코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어요."라며 입을 열자, 기일과 장례식 동안 멍하니 앉아만 있으면서 지금까지 울지 못했다는 걸, 이게 처음으로 우는 것이란 걸, 어째선지 알 수 있었다. 두 팔을 둘러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절대 입을 맞추려던 것도 아니었고, 그다지, 입을 맞추지도 않았다. 다만 입술이 가볍게 이마에 스치며 잠깐 동안 머리를 쓸어주는, 그게 전부였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줄리."라며 말을 꺼냈다. "너한테는 빈자리가 얼마나 클지."

 "아빠는 돌아가실 걸 쭉 알고 계셨어요." 그녀는 말했다. "분명 실험실에서 하셨던 스트론튬-90 원소 실험 때부터 알고 계셨을 거예요. 그치만 아무한테도 말 안하셨어요, 심지어 저한테도…. 살고 싶지도 않아요. 아빠가 안계시면 저한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구요!"

 그녀를 꼭 안았다. "분명 뭔가, 누군가 생길거다 줄리. 넌 아직 어리잖아. 아직은 아이인 게 당연하지."

 불쑥 고개를 뗀 그녀가 갑자기 물기 가신 눈으로 치켜봤다. "전 애가 아니에요! 어쩜 그렇게 꼬마 취급 할 수 있어요!" 

 움찔 하며 그녀를 놓아주고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나 화내는 모습은, 그는 본적이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분노는 갑작스러웠던 만큼이나 빠르게 옅어졌다. "제 맘 상하게 하시려던 게 아니란 거 알아요 랜돌프 씨. 그치만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정말 아니니까요. 다신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당연하지." 그가 말했다. "약속 할게."

 "그럼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라며 그녀가 운을 뗐다. "해야 될 일이 산더미라서요."

 "내, 내일도 여기 올 거니?"

 그녀는 한참을 바라봤다. 여름에 내린 소나기 바로 다음 같은 안개에, 푸른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타임머신이 망가져가요." 그렇게 말했다. "교체해야 될 부품들이 있는데 저로써는 할 방법이 없어요. 우리 건, 아니 제 걸론 한 번 정도 되겠지만, 확신은 못해요."

 "그래도 와 볼 거지, 꼭?"

 그녀가 주억이며 답했다. "그럼요, 해볼 거예요. 그런데 랜돌프 씨?"

 "뭐니 줄리?"

 "혹시라도 못 오더라도, 확실히 해두고 싶으니까요. 좋아해요."

 그리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가뿐하게 언덕을 달려 내려가서, 잠깐 지나서는 사탕단풍나무 숲으로 사라졌다. 그의 떨리는 손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었고, 성냥은 손가락 잡은 데까지 타들었다. 그 뒤 오두막으로 돌아온 길이며, 저녁상 차리는 거라든지, 침대에 들어오는 데까지 전혀 기억은 안 났지만, 방에서 깬데다 부엌에는 저녁식사에 쓰던 접시들이 설거지도 다 된 걸로 보면, 하기는 전부 다 한 모양이다.

 일찍 자리에 도착한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서, 숲을 나와 비탈을 오를 그녀를 기다렸다. 가슴은 두방망이질 치고,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에요.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그림자가 늘어나고 바람에도 한기가 들 즈음, 언덕을 내려가 사탕단풍나무 숲으로 들어가 봤다. 금방 길을 찾은 그는 숲이라고 할 만한 깊이까지 따라 들어가 그 길로 마을을 찾아갔다. 작은 우체국에 들러서는 아무 편지라도 있는지 확인해 봤다. 여윈 우체국장이 없었다고 말해줬는데도 순간 머뭇거렸다. "호, 혹시 이 주변에 댄버스라는 성을 쓰는 집이 있습니까?" 불쑥 그가 물었다.

 그 우체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일 없구려."

 "최근에 마을에 장례식이 있던 적은요?"

 "올해는 없었시다."

 그 뒤, 휴가가 다 가도록 매일 오후마다 언덕에 들렀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오지 않으리란 걸,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깨끗이 잊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마을에 들르는 저녁이면 언제나 우체국장이 실수했을 거라고 몹시도 바랐다. 그러나 줄리는 흔적도 안보였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아느냐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이기만 했다. 이른 10월, 그는 도시로 돌아왔다. 앤에게는, 무엇 하나 바뀐 것 없다는 듯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그런데도 이젠 그가 이제 어딘가 모르게 바뀌었다는 걸 아는 듯 보였다. 또,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갔고, 그가 당혹하던 눈에 어린 두려움도 점점 짙어져 갔다.

 그는 일요일 오후 마다 교외로 나가서 언덕 꼭대기를 올라 다녔다. 숲은 이제 금빛으로 번졌고 하늘은 한 달 전보다 훨씬 푸르렀다. 그런데서 몇 시간이고 화강암 벤치에 앉아서, 그녀가 사라졌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에요.

 그러던 10월 중순의 비 내리는 어느 밤, 마크는 그 여행 가방을 찾았다. 앤의 물건인데,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빙고를 하러 시내로 나가있고, 혼자 남아서 집을 보던 중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이나 지루해 빠진 프로그램을 네 개나 보고 나서야 지난겨울에 처박아뒀던 직소퍼즐을 기억해냈다.

 줄리를 마음속에서 내보낼 무언가가, 뭐든 간에 절실했던 그는 다락으로 찾아 올라갔다. 옆에 쌓인 상자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선반에서 떨어진 여행 가방은 바닥에 부딪쳐 활짝 열렸다.

 몸을 굽혀 집어 올렸다. 결혼하고 빌린 작은 아파트에 가져왔던, 왜 항상 그리 잠궈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남편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라고 말하던 기억에 있는, 그것과 같은 여행 가방이었다. 잠금쇠는 수년간 녹슨 탓에 떨어지면서 부서졌다.

 뚜껑을 닫으려다가 비집어 나온 흰 드레스 자락을 보고,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어렴풋이 낯익은 재질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데서 꼭 닮은 재질을, 솜사탕과 바다거품과 눈이 연상되는 옷감을 본 적이 있다.

 뚜껑을 열어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들어올렸다. 어께 부분을 잡아 펼치자 서서히 눈 내리듯 방안에 펼쳐졌다. 목이 메어 한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고이 접어 여행가방에 담에 뚜껑을 덮었다. 그는 그걸 구석진 처마 밑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에요.

 빗방울이 지붕을 때렸다. 목구멍이 너무 먹먹해져서 순간 울 뻔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락 계단을 내려왔다. 나선 계단을 지나 거실로 갔다. 벽난로 위에 놓인 시계가 열 시 사십 분을 가리킨다. 조금만 지나면 빙고버스가 그녀를 모퉁이에 내려주고, 그녀는 큰길을 내려와서 보도를 따라 현관으로 온다. 앤이… 줄리가 말이다. 줄리앤(Julianne)?

 그게 진짜 이름일까? 그럴 것이다. 사람이 가명을 쓸 땐 언제나 본래 이름의 일부분를 따서 쓴다. 그러니 그녀도 성을 바꿔 대면서, 필시 이름까지 바꾸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지. 시간경비대를 따돌리려고, 이름 바꾸는 것까지 더해서 분명 여러 가지 일들도 해왔으리라. 사진에 찍히고 싶지 않아 했던 것도 당연할 밖에! 일자리를 물으러 겁에 질린 채 사무실에 들어온 날부터 그 긴 나날을 대체 얼마나 떨어왔을까! 낯선 시대로 그저 혼자서, 시간에 대한 아버지 개념이 들어맞는지 어떨지 확실히 알지도 못한 채로, 사십대에 자신을 사랑했을 남자가 이십대에도 그렇게 느낄지 어떨지 확실히 알지도 못한 채로. 그녀는 말했을 그대로, 확실히 돌아와 있었다.

 이십 년의 세월, 그게 의아했다. 내가 9월 언덕을 오르고, 햇살 한 가운데 서있는 어리고 아름다운 자신과 만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반해버리는 그 날을, 분명 그녀는 여태껏 알고 있었다. 내 미래에서 만큼이나 그녀의 과거에 있어서도 크나큰 한때였으니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왜 말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말하지 않는걸까? 

 불현듯 그는 이해했다.

 숨 쉬기 힘든 그는 현관으로 나가 우비를 걸치고 빗속으로 내디뎠다. 비 내리는 보도를 따라 걸으니 빗물이 얼굴에 퍼부었다. 얼마쯤은 빗방울이, 또 얼마쯤은 눈물이, 빰을 타고 뚝뚝 흘렀다. 어느 누가 앤처럼—줄리처럼 영원히 아름다울까, 늙어가는 걸 겁낸다? 그가 보기엔 그녀는 나이가 들지 않던 것을, 책상 앞에서 올려다보자 자그마한 사무실에 그녀가 보인 동시에 반해버린 그 순간부터 단 하루만큼도 변함이 없던 모습을, 그녀는 알아채지 못한 걸까? 그런 탓에 언덕에서 본 소녀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 걸 몰랐던 걸까?

 큰길에 다다라서 모퉁이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빙고버스가 서서히 멈춰서 정지할 때 쯤 그도 거의 다 갔고, 하얀 트렌치코트를 입은 소녀가 내렸다. 목메임이 칼날 같아지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민들레 빛 머리칼은 이제 어두워졌고 소녀다운 매력도 사라졌음에도, 11월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 상냥한 얼굴엔 여전히 잔잔한 아름다움이 남아있었고, 길고 가는 두 다리에는 9월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 아래서는 알지 못했던, 그런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가 마주 다가왔고, 그 눈에 담긴 익숙해진 두려움, 이젠 그 이유를 알기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가슴 저린 그 두려움이 보였다. 그 모습이 뿌옇게 번져보여서 무턱대고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녀에게 이를 때 쯤 시야가 밝아졌고, 시간을 넘어서 뻗은 손이 비로 젖은 뺨에 닿았다. 그제서야 확실히 이해한 그녀는 두려움을 영원히 날려버렸고, 둘은 손을 맞잡고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The End

-Translated by Lee Junho
 , From Sep_02.2010 To Apr_0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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